툴라(몽골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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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몽골 제국의 인물.
2. 생애[편집]
어려서부터 힘이 센 것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툴라는 칭기스 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의 후손이었다. 그러니까 차가타이 칸국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307년 원나라 성종 올제이투 칸이 죽은 뒤 아유르바르바다에게 불려 원나라 정계에 진출했다. 당시 좌승상 아쿠타이 등은 안서왕 아난다를 옹립하려고 모의하고 있었다. 툴라는 아쿠타이 등을 포박해 내쫓았고 아유르바르바다의 형 카이샨이 성종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카이샨은 무종 쿨루크 칸이고, 그 동생 아유르바르바다는 뒤를 이어 즉위한 인종 부얀투 칸이다.
툴라는 대덕 11년(1307) 가을 월왕(越王)의 일자왕호와 금인(金印)을 받고 월주로(越州路)[1] 또는 소흥로(紹興路)[2] 를 봉지로 분봉받았다. 또 며칠 뒤에는 제왕(諸王) 우투시부카(兀都思不花)와 함께 교초 1만정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툴라는 자신이 받는 대우에 만족하지 못했고, 부족한 대우에 원망하는 마음을 품었다. 지대 원년(1308) 가을, 무종이 양정(涼亭)에 행차하고 배에 오르려는데 툴라가 무종의 앞을 막아섰다. 왜 앞을 막아서느냐는 무종의 질문에 툴라는,
라며 몽골의 속담을 말했다. 툴라는 제배(儕輩, 한패)간에 서로 너무 인색한 것 아니냐고 불평하려는 의도에서 속담을 인용한 것이고, 부족한 것 없이 대우해줬던 무종은 이 사건을 계기로 툴라를 마음에 두게 됐다. 그리고 얼마 뒤 만세산(萬歲山)에서 연회가 있었는데, 취한 툴라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띠를 풀어 바닥에 던지고는 무종에게 눈을 부릅뜨며,人有常言: 一箭中麋, 毋曰自能; 百兔未得, 未可遽止.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화살 하나로 큰 사슴을 맞췄는데 자기도 할 수 있다고 말하면 안 되고, 백마리 토끼를 얻지 못했다면 군색하게 그만두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여러 신하들이 듣는 앞에서 주사를 부렸다. 무종은 툴라에게 배반할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더욱 의심하게 됐다. 결국 이듬해인 1309년 봄 황제의 명령에 따라 초왕 야크두(牙忽都), 승상 토크토아, 평장정사 치긴테무르(赤因鐵木兒[3] )가 툴라를 국문했고, 유죄가 인정돼 정월 경인일에 사사됐다.爾與我者,止此爾!
너는 나와 함께했으니 이와 같이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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